소래포구의 역사는 일제치하에 있던 1930년 후반 화약의 원료인 양질의 소금을 이 지역에서 수탈하기 위해 철도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소래포구하면 떠오르는 생산물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젓갈이다. 젓갈의 가장 중요한 것은 염도인데 소래포구의 양질의 소금과 오래 축적된 노하우가 각지의 사람들을 몰려들게 만들었다.
2006.7.25 소래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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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포구는 이제 서울 ·인천을 비롯한 수도권 주민들이 즐겨 찾는 당일 코스 관광지로 정착했다. 이곳 어시장에서는 그날그날 어획한 신선도가 높은 생선을 공급하고 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도 부둣가에는 활어회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런 사람들 주위에는 남은 회나 사람들이 던져주는 먹이를 먹으려는 갈매기가 맴돌고 있었다. 우리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갈매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2006.7.25 소래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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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포구의 갈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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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포구의 갈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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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포구의 갈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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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포구의 갈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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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포구의 갈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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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궤철도에서 소래포구를 한동안 바라보다 저녁을 먹으러 철길을 돌아내려왔다. 철길 밑에는 조개구이집이 즐비했다. 화평동에서처럼 호객행위 하는 아주머니들 때문에 한 발자국을 움직이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소래포구하면 유명한 것이 조개구이였기 때문에 며칠 전 을왕리해수욕장에서도 조개구이를 맛보았던 나지만 이번에도 친구들과 함께 조개구이를 먹기로 했다. (서해안으로 놀러 가면 가는 곳마다 조개구이를 먹는 것 같다. 안면도에서도, 제부도에서도, 인천에서도 말이다.) 2만원이면 다 해결된다는 삐끼(?) 아주머니의 말만 믿고 한 음식점에 들어갔는데, 정작 2만원짜리 조개구이를 주문하니 못마땅해 한다. 우리도 거기에 약간 기분이 상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서 인터넷에 올라왔던 소래포구에 대한 좋지 않은 글이 머릿속을 지나가고.. 예전엔 인심이 후했다고 하던데 점점 그 모습이 사라져 가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다행히도 주문을 하고 음식이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우리의 기분도 풀리고 맛있게 저녁을 즐길 수 있었다.
2006.7.25 소래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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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먹고 나니 밖은 벌써 어둠이 깔렸다. 우리는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포구들 한 바퀴 둘러보기로 했다. 시장에는 각종 생선과 수산물로 가득했고, 가격을 흥정하는 사람들, 회를 뜨는 사람, 생선을 진열하는 사람들 등으로 시끌벅적했다. 바다의 짠 냄새와 함께 사람 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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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백운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아침 8시부터 12시간이 넘도록 버스를 타고 걷고 사진을 찍고 다녔으니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피로가 밀려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여행이라 하면 서울의 공해와 각박함을 떠나 탁 트인 동해바다나 저 멀리 남해바다로 눈길을 돌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천은 비록 도심에 있기는 하지만 서울의 그것과는 많이 다른 곳이었다. 장마로 인해 취소된 부산여행을 대신하기 위해 갔던 여행이었지만 정말 기억에 남는 여행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달리는 버스 안에서 서서히 잠들어 갔다. 이렇게 우리의 여행이 끝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