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마취과로 오기까지도 많은 일이 있었다. 1텀에 마취과에서 두 명이 사직을 했기 때문에 이번 텀을 도는 마취과 인턴 중 한 명은 다른 과로 충원을 가야하는 상황이었다. 근데 충원되는 과가 난이도 10점의 정형외과라는 청천벽력 같은 공지를 보게 되었다. 1/10의 확률이라지만 난이도 6~7점의 신촌마취에서 신촌정형외과의 충원은 분명 살 떨리는 일이다. 게다가 이렇게 강압적으로 충원되는 상황이 아니라면 신촌마취에서 신촌정형으로 바꾸는 대신 300~400만원을 주는 상황에서 금전적으로도 아까운 일이다.
그런데 다음 날 재공지가 올라왔다. 난이도를 고려해서 일산영상의학과로 충원인원을 보낸다는 것이다. 일산영상의학과는 난이도가 4점정도 되는 꿀 중의 꿀로 우리는 하루 동안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했다.(그 무시무시한 신촌정형외과는 신촌내과에서 충원하게 되었다.) 이제는 편한 과를 찾아 일산영상의학과를 가야할지 원래 가려고 했던 마취과를 갈지 행복한 고민을 하는 상황이 됐다. 나는 편한 과보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마취과를 가기로 했다. 요즘 수술과에 관심이 많은데 수술과 항상 관련이 있는 마취과에 대해서도 경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술하는 동안 마취과에서는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마취과의 일은 생각처럼 녹록치 않았다. 지금까지 했던 수술방이나 병동 잡일과는 다른 종류의 일을 하는데 일을 배울 틈도 없이 바로 혼자 환자를 keep하게 된다. 게다가 실수라도 하게 되면 환자의 생명과도 연관되는 상황이라 그로부터 오는 부담감은 무척이나 심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레지던트나 펠로우 선생님께 연락하면 되지만 계속 연락하기도 눈치 보이고 어떤 상황이 정말 중요한지 모르니 가슴만 탔다. 환자의 혈압이 이유도 없이 갑자기 10~20 떨어지거나 상승하게 되면 내 혈압도 같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했다.
마취를 깊게 하면 혈압이 떨어지고, 그렇다고 얕게 하면 환자가 깨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 해야 하는데 처음에는 어느 정도가 환자가 깨는 상황인지를 모르니 떨어지는 혈압을 올리려고 가스를 줄이면 그때부터 환자가 깰까 조마조마 하게 된다. 1텀 돌 때 마취과에서만 인턴 두 명이 도망갔다고 들었는데 정말 첫 주를 돌 때는 그 인턴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나도 일산영상의학과를 갈 걸 괜히 마취과 왔다고 후회 많이 했으니까..
마취를 며칠 돌아보니 기본적인 개념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 어느 정도 일이 손에 익고 어떤 상황에서 환자가 깨는지 알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약을 써야하는지 알게 되고 나니 좀 여유가 생겼다. 처음 시작할 때는 너무 힘들다고 느껴서 후회도 됐는데 그동안 힘든 만큼 마취과에 대해 많이 알게 되고 배우게 되어 내 선택에 만족한다. 또 그동안 해오던 잡일과는 달리 수술하는데 꼭 필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이 보람도 느끼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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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필리핀에도 국립대학인 UP, 사립 대학교인 Ateneo, La Salle, 그리고 UST 이렇게 4대 명문대학교라는 게 있다. 나와 친하게 지낸 AMSA Philippines 학생들이 대부분 UST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여러 번 UST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1611년에 설립된 UST는 아시아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대학교라고 한다. 필리핀 최고의 영웅인 Dr. Jose Rizal을 비롯해 많은 사회 유명 인사를 배출하였고 특히 의학과 예술이 유명하다.
Choa가 가이드 해줘서 의과대학 구석구석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 스페인 식민지 동안의 문화 때문인지 서구적인 건물구조와 학생들의 문화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시설은 한국 보다 열악하지만 본과3학년만 되어도 환자들 문진이며 신체검사를 직접 할 수 있는 환경이 부러웠다. Choa가 원한다면 병원에서 일할 수 있게 얘기해줄 수 있다고 했는데 정말이지 시간이 돼서 여기서 일을 할 수 있다면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럴 여유가 없어서 아쉬웠다.
Choa가 가이드 해주면서 알려준 내용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필리핀은 부유한 사람들이 가는 병원과 가난한 사람들이 다니는 병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똑같은 의료혜택을 받는 한국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하지만 필리핀에서 그런 의료시스템을 적용해도 사회적 불만 없이 잘 돌아가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UST 학생들 사이에서 재미있는 미신이 있다. 학교 입구에 Arch of the century라는 문이 있는데 이 문은 UST학생들이 입학할 때 통과하고 졸업할 때 통과한다고 한다. 근데 졸업도 하기 전에 이 문을 통과하면 졸업을 할 수 없게 된다는 미신이다. 근데 UST 학생들은 정말 이 미신을 믿고 있는 듯하다. 내가 Kai에게 장난으로 손을 끌고 데리고 가려고 하니 정말 강력히 뿌리치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 후 Kai와 티격태격할 때마다 자꾸 그러면 Kai를 안고 문을 통과해 버린다고 협박(?)을 하곤 했다.
UST에 대해 아는 게 없어도, 관심이 없어도 한 번 방문해볼만한 곳이다. 낙천적인 필리핀 학생들을 속에서 필리핀의 문화를 볼 수 있고 또한 학교자체로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UST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다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