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막혔던 한 시간

2008/09/24 01:54

어제 국제진료소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세브란스 자원봉사센터에서 걸려온 전화였는데 다짜고짜 오늘 오후에 봉사활동을 할 수 있냐고 물어보시는 거다. 지금 국제진료소에서 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조금 이따 자원봉사센터로 내려오라고 하신다. 영문도 모른 채 내려갔더니 나보고 외국인환자 심리테스트 하는데 통역을 하라고 하신다. 보통 국제진료소에 유학생이 많아 거기서 자원봉사 하는 사람은 영어에 능통하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사실 나도 국제진료소에서 일하고 싶어 영어를 좀 하는 것처럼 적긴 했다. ㅡ.ㅡ) 나는 영어에 유창하지 않아서 못하겠다고 했지만 지금은 사람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하게 됐다. 그동안 국제진료소에서 입원수속을 도와주거나 의료장비를 사용할 때 간단히 통역을 한 적은 있지만 이건 심리테스트를 통역하는 건데 나의 짧은 영어로는 힘들어 보였다. 그래도 어쩌겠나. 나는 벌써 재활병원을 향해 가고 있으니..

자원봉사를 하면서 가끔 통역을 할 때가 있는데 영어는 잘 못하지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주눅 들지 않고 하고 있다. 첫 째는 말은 잘 못해도 알아듣는 건 대부분 알아들으니 환자가 내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고 잘못 알아들었으면 다시 말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나는 자원봉사자라는 상황 때문이다. 즉 정말 큰 잘못만 안하면 혼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이것만 믿고 재활병원으로 갔다.

재활병원에 가니 흑인환자가족이 기다리고 있었다. 말하는 걸 대충 들어보니 강한 흑인 억양에다 남부 사투리까지 쓴다. 더 최악인건 환자보호자가 성질이 사납기로 이미 병원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환자와 보호자 한 명만 들어오라고 말하니 들어오면서 의사 선생님은 왜 영어를 안 하냐고 따진다. 그래서 내가 통역을 한다고 했더니 너도 유창하지 않은 것 같다고 투덜거린다. 그래도 어쩌겠나. 상황이 이러니 나라도 믿고 해야지.

환자상태는 많이 안 좋아 보였다. 나이 많은 할아버지였는데 쇼크가 때문에 사고 판단이 안 되고 의사소통도 불가능 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보호자에게 환자가 쇼크가 있은 후에 어떻게 달라졌는지 심리변화는 어땠는지 물어보는데 시간을 보냈다. 아무래도 보호자는 그 상황에 대해서 불만이 많은 것 같았다. 물론 통역이 어설픈 나에게도 불만이 있었겠지만 자원봉사자라는 네임택을 달고 있으니 그 화살이 의사선생님에게로 갔다. 눈을 부릅뜨면서 왜 당신이 말하지 않느냐며 따지며 영어로 말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환자가 치료를 받고 약을 먹어서 최상의 상태가 아닌데 지금 이 시간에 테스트를 하는 것은 당신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프로페셔널하지 않다면서.. 사실 의사선생님은 이미 환자의 상태를 파악했고 더 이상의 검사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지만 워낙에 따지는 바람이 보호자가 원하는 대로 아침시간에 다시 검사하기로 했다.

환자가 나간 후 선생님은 다음번에도 와달라고 하셨다. 다행히도 그 시간에는 학원이 있어서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시간이 있었어도 글쎄.. 그 방에서 통역을 한 건 한 시간 정도였지만 정말 힘들었다. 도움이 필요하신 선생님을 두고 도망 온 것 같아 죄송스럽긴 하지만 나도 살아야지 어쩌겠나. 세브란스면 우리나라 최고의 병원 중에 하나인데 다른 대안은 있으니라 생각한다.

재활병원을 나오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내가 만약에 미국에 있었고 병원에 갈일 있었다면 그 병원 의사가 한국말을 못한다고 화를 냈을까? 나라면 미국의사가 한국말로 설명해주려고 한다면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감사했을 것 같다. 미국에서는 내가 영어를 못하는 게 잘못이니까. 그렇다고 오늘 이 환자보호자를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비싼 돈 주고(아마도..) 검사를 받는데 상황이 이렇다면 짜증이 날 것이다. 다른 검사라면 몰라도 심리테스트는 누구나 환자와의 의사소통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의 경우 환자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아서 선생님이 판단하는데 별 문제가 없었지만 만약 정말 단어 하나하나에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이런 큰 병원 의사들은 모든 상황을 대비해서 영어는 기본으로 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미국이었다면 의사가 한국어 못한다고 뭐라고 하면 치료도 못 받을 텐데.. 어쨌거나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스스로에게 채찍질 할 수 있던 하루였다.

2008/09/24 01:54 2008/09/24 01:54
Posted by 승호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nefinita.com/trackback/286

댓글을 달아주세요

  1. 나이스한
    2008/09/27 12:06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그런상황도 있을수 있구나...
    영어공부 열심히 해야지ㅠㅠ
    • 2008/09/27 22:55
      댓글 주소 수정/삭제
      이런 일은 거의 없어..ㅋㅋ
      그럼 다음 주부터 봉사활동 시작하는 건가?

<< PREV : [1] : ... [53] : [54] : [55] : [56] : [57] : [58] : [59] : [60] : [61] : ... [111] : NEXT >>

BLOG main image
by 승호

공지사항

카테고리

전체 (524)
끄적끄적 (111)
훈민정음 (43)
찰칵 (111)
여행기 (131)
맛집 (13)
감상 (13)
웃어요 (29)
이것저것 (14)
SFU (43)
WHO (16)

최근에 달린 댓글

태그목록

글 보관함

달력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otal : 1464671
Today : 325 Yesterday : 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