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국제진료소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세브란스 자원봉사센터에서 걸려온 전화였는데 다짜고짜 오늘 오후에 봉사활동을 할 수 있냐고 물어보시는 거다. 지금 국제진료소에서 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조금 이따 자원봉사센터로 내려오라고 하신다. 영문도 모른 채 내려갔더니 나보고 외국인환자 심리테스트 하는데 통역을 하라고 하신다. 보통 국제진료소에 유학생이 많아 거기서 자원봉사 하는 사람은 영어에 능통하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사실 나도 국제진료소에서 일하고 싶어 영어를 좀 하는 것처럼 적긴 했다. ㅡ.ㅡ) 나는 영어에 유창하지 않아서 못하겠다고 했지만 지금은 사람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하게 됐다. 그동안 국제진료소에서 입원수속을 도와주거나 의료장비를 사용할 때 간단히 통역을 한 적은 있지만 이건 심리테스트를 통역하는 건데 나의 짧은 영어로는 힘들어 보였다. 그래도 어쩌겠나. 나는 벌써 재활병원을 향해 가고 있으니..
자원봉사를 하면서 가끔 통역을 할 때가 있는데 영어는 잘 못하지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주눅 들지 않고 하고 있다. 첫 째는 말은 잘 못해도 알아듣는 건 대부분 알아들으니 환자가 내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고 잘못 알아들었으면 다시 말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나는 자원봉사자라는 상황 때문이다. 즉 정말 큰 잘못만 안하면 혼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이것만 믿고 재활병원으로 갔다.
재활병원에 가니 흑인환자가족이 기다리고 있었다. 말하는 걸 대충 들어보니 강한 흑인 억양에다 남부 사투리까지 쓴다. 더 최악인건 환자보호자가 성질이 사납기로 이미 병원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환자와 보호자 한 명만 들어오라고 말하니 들어오면서 의사 선생님은 왜 영어를 안 하냐고 따진다. 그래서 내가 통역을 한다고 했더니 너도 유창하지 않은 것 같다고 투덜거린다. 그래도 어쩌겠나. 상황이 이러니 나라도 믿고 해야지.
환자상태는 많이 안 좋아 보였다. 나이 많은 할아버지였는데 쇼크가 때문에 사고 판단이 안 되고 의사소통도 불가능 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보호자에게 환자가 쇼크가 있은 후에 어떻게 달라졌는지 심리변화는 어땠는지 물어보는데 시간을 보냈다. 아무래도 보호자는 그 상황에 대해서 불만이 많은 것 같았다. 물론 통역이 어설픈 나에게도 불만이 있었겠지만 자원봉사자라는 네임택을 달고 있으니 그 화살이 의사선생님에게로 갔다. 눈을 부릅뜨면서 왜 당신이 말하지 않느냐며 따지며 영어로 말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환자가 치료를 받고 약을 먹어서 최상의 상태가 아닌데 지금 이 시간에 테스트를 하는 것은 당신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프로페셔널하지 않다면서.. 사실 의사선생님은 이미 환자의 상태를 파악했고 더 이상의 검사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지만 워낙에 따지는 바람이 보호자가 원하는 대로 아침시간에 다시 검사하기로 했다.
환자가 나간 후 선생님은 다음번에도 와달라고 하셨다. 다행히도 그 시간에는 학원이 있어서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시간이 있었어도 글쎄.. 그 방에서 통역을 한 건 한 시간 정도였지만 정말 힘들었다. 도움이 필요하신 선생님을 두고 도망 온 것 같아 죄송스럽긴 하지만 나도 살아야지 어쩌겠나. 세브란스면 우리나라 최고의 병원 중에 하나인데 다른 대안은 있으니라 생각한다.
재활병원을 나오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내가 만약에 미국에 있었고 병원에 갈일 있었다면 그 병원 의사가 한국말을 못한다고 화를 냈을까? 나라면 미국의사가 한국말로 설명해주려고 한다면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감사했을 것 같다. 미국에서는 내가 영어를 못하는 게 잘못이니까. 그렇다고 오늘 이 환자보호자를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비싼 돈 주고(아마도..) 검사를 받는데 상황이 이렇다면 짜증이 날 것이다. 다른 검사라면 몰라도 심리테스트는 누구나 환자와의 의사소통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의 경우 환자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아서 선생님이 판단하는데 별 문제가 없었지만 만약 정말 단어 하나하나에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이런 큰 병원 의사들은 모든 상황을 대비해서 영어는 기본으로 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미국이었다면 의사가 한국어 못한다고 뭐라고 하면 치료도 못 받을 텐데.. 어쨌거나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스스로에게 채찍질 할 수 있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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