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해부학실습을 시작하면서 각오를 다지려고 끄적이던 게 기억난다. 그때는 모든 것이 새롭고 두렵기도 했다. 우리 카데바 할아버지 얼굴을 보는 것도 두려웠고, 지방 냄새와 방부액 냄새도 적응이 안 돼서 숨쉬기도 힘들었다. 다섯 달이 지나고 마지막 해부학실습이 끝난 지금, 달라진 모습에 스스로 놀란다. 환경이 사람을 이렇게 바꾸나 보다. 실습실 앞에서부터 긴장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느덧 이곳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자연히 실습실 냄새에도 둔감해지고.. 언제부터인지 몸에서 해부 특유의 냄새가 나는지도 모르고 돌아다니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름 해부학실습을 하면서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다. 개인적으로는 주어진 단 한 번의 해부학실습 기회를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았고, (해부를 할수록) 시신을 기증하신 분에게도 그러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아쉬움은 남는 법이다. 실습을 하는 동안 좀 더 열심히 공부하고 들어가지 못했을까 후회가 된다. 해부도 아는 만큼 보인다. 동맥을 보면서도 이것이 어떤 동맥이고 어디에 혈액을 공급하는지 알아야 의미가 있는 거지 그렇지 않다면 동맥 하나 더 찾았다는 것 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제우스 신전이나 헤라 신전이나 그저 거대한 대리석 기둥들인 것처럼.. 돌이켜보면 난 그저 열심히 파는 포크레인에 불과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렇게 길게 달려온 해부학실습이 끝났다. 이제는 본1생활에서 가장 힘들다는 약리학수업이 시작된다. 그래도 이렇게 하나씩 끝내다 보면 어느새 1학년이 지나가리라 믿는다. 빨리 겨울방학이 왔으면 좋겠다.
<< PREV :
[1] : ... [101] : [102] : [103] : [104] : [105] : [106] : [107] : [108] : [109] : ... [524] :
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