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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nternship에 지원하기 위해 제출서류를 준비하면서 느꼈던 일이다. Internship에 지원하기 위해서 CV, cover letter, recommendation letter를 준해해야했다. WHO에 계신 한국직원의 도움으로 과거 WHO 인턴의 cover letter를 참고할 수 있었는데 그 인턴의 글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WHO에서 인턴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준비했고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개인적인 내용이라 자세히 언급하기는 그렇고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본다면 대학을 다니는 동안 WHO에서 일하게 되면 도움 될 과목들을 찾아 수강한 것이다. 최소한 WHO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찾아보고 그것에 필요한 것을 준비할 만큼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자기 목표를 위해 이렇게 준비하는 게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WHO가 무엇을 하는 기관인지조차 정확한 개념도 없이 국제기구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지원하게 된 나에게는 얼마나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나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WHO internship을 지원하면서 정작 내가 한 게 거의 없다. 언제 지원하라고 알려주시고, 자신의 CV를 참고하라고 보내준 선배도 있고, recommendation letter를 쓸 때 참고하라고 보내준 동기, cover letter 역시 참고하라고 보내주셨고, 영어를 못하는 나를 위해 내 서류를 교정해준 캐나다 친구와 룸메 선빈이.. 주위사람들의 이런 도움이 없었다면 난 인턴생활을 절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만 보면 내 삶은 늘 이런 식이었다. 난 아무런 능력도 없는 사람인데 예쁜 옷도 입혀주고 맛있는 음식도 떠먹여주는 주위사람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오게 됐다. 또 세상은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대학 들어갈 때도, 의전원이란 제도가 생긴 것도, 그리고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연대가 나에게 가장 유리한 전형이었던 것도.. 스스로 노력을 전혀 안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내가 노력한 것보다 많이 얻는 삶을 살았다. 요즘은 그런 것에 익숙해져 있어서 너무 나태해졌음을 느낀다. 그저 잘되겠지 하는 막연한 믿음 때문에.. 세상이 내게 기회를 주는 만큼 나도 그만큼 노력하는 게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한다. 이제라도 다시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살아야지.
인턴생활을 하려고 필리핀의 물가를 알아보니 생각보다 비쌌다. 예전에 얼핏 들은 기억으로는 한 달에 50만원이면 수영장 딸린 집에서 개인과외선생님을 두고 영어를 배운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완전 딴판이었다. WHO에서 인턴을 한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니 보통 숙소는 보통 한인 홈스테이나 몰에 있는 아파트에서 생활을 했다. 한인 홈스테이는 한 달에 대략 70만 원 정도이고, 아파트는 그것보다 비쌌다. 숙소가 좋든 나쁘든 잠만 자면 되는데 그렇게 돈을 내기가 아까웠다. 차라리 저렴한 숙소를 구하고 남은 돈으로 맛있는 음식이나 즐기는데 쓰고 싶었다.
처음 생활하면서 가장 문제가 됐던 부분이 모기와 더위였다. 모기에 물리는 것도 짜증났지만 필리핀은 말라리아와 댕기열이 있는 곳이라 그게 가장 신경 쓰였다. 그 문제는 침대에 모기장을 치는 것으로 해결. 필리핀에 처음 왔을 때는 무척 덥게 느껴져서 선풍기를 틀어도 잠자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겨울이라 기온이 떨어진 건지 몸이 이곳의 온도에 적응한 건지 요즘은 선풍기를 틀지 않고도 잘 잔다. 샤워실도 지저분하다고 느꼈는데 금방 적응이 됐다. 뭐.. 제중학사도 처음에는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까 걱정했지만 지금은 잘 살고 있으니..
이곳 생활에 적응이 되니 ASI의 좋은 점이 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사실 ASI는 대학원이다. 그러니까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대학원의 기숙사가 되는 것이다. 베트남, 미얀마, 중국 등 아시아의 다양한 나라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 살고 있는데 학생들 하나하나가 다 착하다. 이 친구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얘기하겠지만 이 친구들 때문에 이곳에서의 생활이 활기차고 생기 있어지기 시작했다. 또 WHO와 걸어갈 정도 가까운데다 문 앞을 지나가는 모든 Jeepney가 WHO를 지나가기 때문에 교통이 무척이나 편하다. 근처에는 Robinson mall이라는 대형 쇼핑몰도 있고 ASI 바로 앞은 재래시장이 있어 생활하기도 편하다. 무엇보다도 ASI 주위는 다른 지역에 비해 안전하기 때문에 늦은 시간에 들어가도 안전해서 좋다. (안전하다고 해도 늘 경계는 하고 다닌다.) 게다가 문에 항상 경비가 감시하고 있고..
지금은 이곳에서 살고 있는 게 너무나 좋다. 특히 여기 친구들 때문에 이곳을 떠나기 싫어진다. 지금도 몰에 있는 아파트로 들어갈 수는 있다. WHO에서 같이 인턴을 하는 분이 언제든 그냥 들어와 살아도 좋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아파트로 가면 돈도 절약되고 좋은 시설에 쾌적한 삶을 살겠지만 난 지금 생활이 너무도 행복하다. 인턴생활이 끝날 때까지 여기서 지낼 생각이다. 처음 도착해서 어떻게 살까 걱정하던 내가 ASI를 이렇게 좋아하게 되다니 생각하면 참 웃긴 일이다.
WHO의 인턴이 확정된 후 앞으로 두 달 생활하게 될 필리핀에 대해 찾아보게 되었다. 내가 필리핀에 살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그동안 필리핀에 대해 좋은 얘기를 들은 적도 없었다. 치안이 안 좋고(특히 내가 살게 될 마닐라ㅠ), 성매매가 활개를 치고, 맥주가 싸다는 정도??
찾아볼수록 마음에 걸리는 게 치안문제였다. 소매치기가 많은 것은 내가 늘 정신을 차리면 된다고 하지만 강도를 만나는 것은 그야말로 복불복 아닌가? 길가다가 등에 총이나 칼을 겨누고 돈을 달라고 하면 방법이 없지 않나? 돈뿐만 아니라 돈이 될 만한 건 다 빼앗긴다고 보면 되니..
그동안 인도, 네팔, 미얀마를 오랜 기간 여행했고 각종 사기꾼, 소매치기를 만났지만 최소한 이들 나라는 여행자를 위협하지는 않았다. 인도만 하더라고 그 많은 사기꾼을 만났지만 사기를 치다가도 내가 화를 내면 능글맞게 ‘calm down'하며 기분을 풀어주곤 했다. 하지만 필리핀은 진지하게 목숨을 걱정해야할 판이니 가기 전부터 마음이 심란했다.
WHO에서는 공항 pick-up service를 제공한다. 운이 없게도 난 필리핀 공휴일에 끼는 바람에 알아서 숙소까지 가야만 했다. 영락없이 택시를 타야해서 가이드북에 찾아보니
1. 정차해 있는 차보다는 움직이는 택시를 세운다.
2. 택시 문을 열고 아직 타지 않은 상태에서 미터기를 가리키며 ‘미터?’라고 미리 확인하면 좋다.
3. 미터기를 켜지 않으면 ‘미터 플리즈’라고 말하고 만약 딴소리를 하면 내릴 준비를 한다.
4. 요금에 대해 협상을 해야 한다면 일단 미터기를 켜게 하고 그 요금에서 얼마를 더 주겠다는 식으로 하는 것이 좋다.
5. 절대 싸우지는 말 것. 치명적인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6. 요금에 대한 모든 결정은 택시를 잡고 타는 과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서 가장 거슬리던 사항이 5번이었다. 이건 사기를 쳐도 당하라는 말아닌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쩌겠나.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라야지. 위 사항을 숙지하고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한국유학생처럼 보이는 사람을 발견하곤 말을 걸었다. 여기서 5년 살았단다. 게다가 마침 가는 방향도 나랑 같고.. 잘 됐다 싶어 옆에 붙어 같이 가기로 했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택시기사가 달라붙는다. 보통 나 같으면 대꾸도 않는다. 이런 사람들 대부분이 사기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유학생은 아무 말 없이 따라가는 것 아닌가? 나보다 잘 알겠지 하면서 나도 따라갔다. 유학생이 필리핀어로 목적지를 말한 후 택시는 움직였다.
그런데 예상했던 대로 택시기사는 미터기를 켜지 않았다. 그러면서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을 부르는 것이었다. 한국유학생도 ‘아! 사기 당했네.’ 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다. 그것도 5년이나 살았다는 사람이.. 어이가 없어서 난 차 세우라고 했고 뻔뻔한 택시기사는 100페소를 달라는 거다. 겨우 100미터도 채 가질 않았는데.. 어차피 질 안 좋은 택시기사하고 싸우면 위험할 것 같아서 그 돈만 내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미터로 가는 택시를 타고 숙소로 왔다. 이게 내가 처음 필리핀에 내리자마자 겪은 일이다.
아무래도 여기서 적응하고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