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6대 살인마

2007/01/05 13:12

빌리 더 키드 (1859.11.23~1881.7.14)


미국서부시대에 가장 악명을 떨쳤던 킬러라고 합니다.
본명 윌리엄 보니(William H.Bonney). 뉴욕 출생.
21년의 짧은 생애에 21명의 사람들을 살해하였다.
본래 뉴욕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적에 양친과 함께
캔자스로 이주하였고, 아버지가 죽자 다시
뉴멕시코에 가서 살았다.
13∼15세 때 어머니를 욕보이려 한 남자를 죽인 것이
악의 길에 빠진 계기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 후 카우보이가 되었는데, 1878년 자기가 속한 목장과
다른 목장과의 싸움(세칭 링컨郡의 싸움)에서
열세인 자기편을 이끌고 대단한 싸움 솜씨를 보여
총잡이로서의 용명을 떨쳤다.
그러나 그 후부터는 무법자가 되어,
소도둑 같은 짓을 한 것으로 전한다.
한때 보안관 S.P.F.갤럿에게 항복하였다가
간수를 죽이고 도망쳤으나, 끝내 갤럿에게 사살되었다.
전설에는 그가 의적(義賊)으로 되어 있으나 근거는 없고,
도리어 잔인하고도 비정한 젊은이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아틸라 더 훈 (406년~453년)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갔던 훈족의 지도자 아틸라.
406년-453년까지 살았다고 전해지는 훈족의 왕입니다.
ROMAN EMPIRE라고 불릴정도로 전 유럽을 정복했던
무시무시한 정복자입니다. 그 당시의 유럽인들은
그의 예기만 들어도 집 대문을 꼭꼭 걸어 잠궜다고
전해질 정도입니다.





라스푸틴 (1872? ~ 1916.12.30)


제정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황제의
외아들 알렉세이가 혈우병으로
생명이 경각에 달했을 무렵
한 사내가 기적처럼 나타나서 황태자의 병을 호전시켜
건강을 되찾게 만들어준다.

왕실의 주치의 조차 포기했던 황태자의 병을
고쳐준 사람의 이름은 라스푸틴.

황제 부부는 곧바로 라스푸틴에게 감사를 표하며
단숨에 그의 열광적인 숭배자가 되어버린다.
라스푸틴은 황제 부처의 총애에 힘입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그에대한 반감도 커지기 시작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라스푸틴은 자신의 최후가 멀지 않았음을 직감이라도 하듯

-이제 곧 내가 죽게 되고, 그 후 더 깊은 뿌리가 잘려나가게 된다

-이제 나는 곧 죽을 것이다

하고 때때로 중얼거렸다고 한다.

라스푸틴이 권력을 남용하여 귀부인들을 농락하고
인사권까지 좌지우지 하며 무엇보다도
황제 부처가 라스푸틴의 말이라면
독이라도 먹을 듯이 그를 감싸고 돌자

러시아의 젊은 귀족들은 비밀리에 그를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암살되던 날 아침,
그는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고 한다.

-저는 정월 안에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나를 죽인 자가 나와 같은 농부라면 황제는
제위에 그대로 머물 것이요
그 자손들이 대대로 제위에 앉아 러시아를 다스릴 것이나
나를 죽인 자가 만일 귀족이라면
그들의 손은 영영 피로 물들 것이고
그들은 조국을 버릴 것입니다. 러시아에서 귀족은 사라지게 됩니다.

제 죽음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채 1년도 되지 않아서 황제와 황후,
그리고 황태자까지 모두 살해당할 것입니다.
러시아 백성이 당신을 죽일 것이요.

그리고 1년 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다.

1916년 러시아의 젊은 귀족들은 라스푸틴을 만찬회에 불러
청산가리가 든 과자를 먹인다.
그러나 라스푸틴은 태연히 독이 든 과자를 먹고
와인까지 마시면서 기분좋게 노래까지 청하는 것이었다.

유스포프 백작이 참다못해 그의 심장에 권총을 겨누었다.
그리고 다른 귀족이 또 한발을 쏘아 맞혔다.
잠깐 쓰러졌던 라스푸틴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공포에 질린 귀족들은 은촛대를 내리쳐
그의 두개골을 난타했다.
간신히 죽은 라스푸틴의 시체를 꽁꽁 언 강의 얼음을 깨고
던져넣었다고 한다.

그 다음날 발견된 라스푸틴의 시체는
놀랍게도 한쪽 손이 구부러져 가슴 께에 십자가를 그리려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가 물속에서 의식을 찾아
있는 힘을 다해 십자가를 그렸다는 증거라고 한다.

그의 시신을 부검한 의사는
그의 폐속에 물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이것은 물속에서 호흡을 했다는 증거이므로..)
익사라는 결론을 내렸다.




잭 더 리퍼 (19세기? ~ ?)


잭 더 리퍼는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연쇄살인마는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가장 ‘현대
적인’ 연쇄살인범의 범주에서는 최고 고참이다. 19세기 말 빅토리아 후기의 영국 사
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이 희대의 인물은 근대사회의 총아인 대중 매체를 통해 전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킨 최초의 ‘스타’ 살인마였다. 또한 지문 채취나 혈액/체액 채
취 추적 같은 근대적 수사방식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당시의 법의학적 수사망은 해박
한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정교하게 자행된 리퍼의 예술(!) 살인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면서 범인 추적에 난항을 겪었다. 당시의 법의학, 제도, 수사망 등 국가 장치들
을 훨씬 앞질러 가며 조롱을 던진 리퍼에 대한 연구는 미국 역사를 통틀어 대통령에
대한 저서를 더한 숫자보다 많을 정도로, 리퍼 케이스에 대한 관심은 아직까지도 만
만치 않다. 학문적 연구에서 단순한 호기심까지, 리퍼 케이스가 이토록 매혹적이기까
지 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리퍼 케이스는 끝내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사건으
로, 연구 자체가 ‘누가 저질렀는가?’라는 고전적인 추리소설(whodunit)의 형태를
띌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21세기에 살고 있는 법의학자나, <프롬 헬>을 통해 호
기심을 가지게 된 관객이나, 리퍼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셜록 홈즈나 에르큘 포와로
가 될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리퍼 케이스가 가진 최고의 매력인 셈이다.
리퍼의 연쇄 살인은 그 시발점에서부터 분분한 의견이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1888년 8
월 31일 살해되어 런던 이스트엔드의 창녀 밀집 거주지역이었던 화이트채플
(whitechaple) 거리에 방치된 채 발견된 메리 앤 니콜스(43)를 리퍼의 첫 번째 범죄
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리퍼가 본격적으로 언론에 드러나기 이전 유사한
창녀 살인이 있었다는 점 때문에, 종종 이 첫 번째 희생자에 대해서는 엠마 스미스
등의 다른 피해자들이 거론되기도 한다. 이후 메리 켈리(25)까지 5명의 창녀가 리퍼
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이야기되어지는데, 이 다섯 명으로 압축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사실 당시만 해도 극심한 하류층에 속한 창녀들이 살해되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었다.따라서 단지 창녀만을 살해했다는 이유만으로 리퍼 케이스를
규정할 수는 없다. 그보다 리퍼 케이스를 규정해 주는 것은 바로 리퍼의 살인방식
(Modus Operandi). 5명의 창녀들은 각자의 정도는 조금씩 차이를 보이지만,
모두 대범하고 정교하게 사체를 유린당했다.
대개의 사인인 칼로 목을 따는 과정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자행되었으며,
그 이외에도 사체 유린 역시 정확한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신속하고
깨끗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은 당시 런던 경찰이 인체와 해부학에 능한 직업을
가진 인물들로 용의망을 좁히는데 결정적인 증거로 작용했다.




블라드 더 임팰러 (15세기 ~ ?)


바로 이사람이 오늘날 드랴큘라로 전해지는 인물입니다.
바로 루마니아의 블라드 드라큘라라는 인물로서 15세기
루마니아 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일 뿐 아니라
오늘날 드랴큘라 예기를 탄생시킨 장본인 이기도 합니다.
그는 무려 10만명에 달하는 백성을 피에 굶주려 학살한
것으로 전해 지고 있습니다





바토리 여백작 (16세기경 ~ ??)★

16세기경 실존했던 엘리자베스 바토리 Elizabeth Bathory는
너무나도 유명한 "피의 여왕"이다.
Elizabeth Bathory는 1560년 Transylvania (현재 루마니아 서북부의 고원지
방)에서 가장 유서깊고 부유하며 영향력있는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집안엔 군주나 추기경도 있었고, 사촌은 헝가리 왕국의 수상이었다.
가장 유명한 친척은 Istvan Bathory (1533-1586), 1575년 부터 86년 까지 트란실바니아의 군주였으며 폴랜드의 왕이었다. Elizabeth Bathory는 4살이나 5살 때 경 극히 심한 발작을 일으켰었다고 한다.
집안 의 근친결혼때문에 발생한 일종의 유전질환인 간질이거나
기타 다른 신경 계통 질환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훗날 그녀가 저지른 끔찍한 범죄 행위와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15살 때 Bathory는 Ferencz Nadasdy 백작과 결혼을 하는데,
백작은 당시 26살이었고, 남편이 아내의 성을 따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부부는 Csejthe (체터) 성에 살았으며,
백작은 투르크와의 전쟁때문에 거의 떨어져 지냈다.
전쟁터에서 누구보다 용감한 남편 Ferencz 백작은 헝가리의 검은 영웅 (Black Hero
of Hungary)이란 별명을 얻었다. 이렇듯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시간을 보내는 남편때
문에 외로워진 Bathory는 젊은 남자와 수많은 염분이 났다. 또한 Thorko라는 하인이 Bathory에게 신비주의, 악마숭배 등등의 것을 전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Bathory는 언젠가 낯선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갔다가 한참 후에나 성으로 돌아온 것
으로 알려져 있는데, 남편인 백작은 쉽게 이를 용서했다고 한다.
거의 남편과 같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도 갖지 못 했고, 결혼한지 10년이 지난
1585년에 딸 Anna를 낳았고, 다음 9년 동안엔 딸 Ursala와 Katherina를, 그리고 1598
년에야 비로소 외아들 Paul을 낳았다.
바로 이 기나긴 기간 동안 Bathory는 유모인 Ilona Joo, 집사 Janos Ujvary, 하인
Thorko, 숲에 사는 마녀 Darvula와 또 다른 마녀 Dorottya Szentes 등과 함께 수시
로 젊은 하녀들을 고문했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진짜 끔찍한 행위로 발전하게 된 계
기는 남편의 죽음이었다. 남편 Ferencz 백작은 1604년 51세의 나이로 전장에서 전사
했고, Bathory의 남성편력또한 심해졌다.
평소에 무척 미워했던 시어머니를 성에서 쫓아내면서 부터, 본격적으로 악마숭배에
빠져든다. 처음엔 말이나 동물들을 제물로 사용했지만, 나중엔 인간 제물을 바쳤다
고 하는데,끔찍한 고문과 살인의 진정한 목적은 젊음을 되찾는 것이었다.
마흔이 넘으면서 곱고 아름다운 얼굴과 피부가 삭아들어가고 있는 것에 초조하던
Bathory는 젊은 처녀의 피로 목욕을 하면 예전의 고운 피부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
했다.
어느날 머리를 빗겨주던 하녀가 실수로 머리를 심하게 당기자, Bathory는 하녀의 얼
굴을 마구 구타했고 그녀의 손톱에 하녀의 얼굴이 긁혀 피가 나왔다. 하녀의 피가
Bathoty의 손에 떨어졌고, 이를 씻던 와중에 Bathoty는 순간적으로 손의 피부가 고와
진 것을 느꼈다. 젊은 처녀의 피가 젊음을 되찾을 수 있는 해답이라 생각한 그녀는 수
시로 처녀를 잡아다 죽여서, 그 피로 목욕을 했다. 이때부터 Bathory는 피의 백작부
인이라는 악명을 얻게 된다.
발목을 밧줄로 묶어서 거꾸로 매단 다음 목을 따서 그 피를 받아 목욕을 했으며, 가
끔 아름다운 처녀 아이가 잡혀오면 특별 메뉴로 피를 마시기도 했는데, 처음엔 잔에
받아마셨지만, 나중에는 직접 목을 물어뜯어 생피를 빨아마셨다고도 전한다.
그녀의 특별한 재미를 위해 허공에 매달아놓은 철창에 처녀를 집어넣고 쇠꼬챙이로
찔러 피를 흘리게 하여, Bathory가 그 철창 밑에 서서 아래로 흐르는 피로 샤워를 했
다고도 한다. 고문은 대개 수하들이 담당했지만, 가끔은 백작 부인이 직접 처녀들을
고문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문을 통해 적의 정보를 캐내는 것이 빈번했던 당시 전쟁덕분에 Ferencz 백작또한
많은 고문기구를 가지고 있었다. 남편의 극악한 고문기구중 하나를 이용해 처녀들을
고문하는 것이 Bathory의 취미기도 했다. 고문은 결코 단시간에 끝나지 않고 어쩔때
는 수주일간 아주 천천히 진행되었다.
1600년 부터 1610년 까지 Bathory는 끊임없이 젊은 처녀를 살해하여 모종의 악마 의
식을 거친 후 그들의 피로 목욕을 했다고 하는데, 죽은 이에 대한 마지막 배려였는
지, 시체를 근처 교회로 보내 신부로 하여금 장례를 치르게 했다고 한다.
까닭없이 실종된 처녀의 수가 너무나 많아지자 그 신부는 더 이상 장례를 치뤄주지
않았고, 소문이 날까 두려운 나머지 Bathory는 신부를 불러다가 누구에게도 비밀을
발설하지 못 하도록 친히 협박을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처녀의 피는
처음 만큼 효과가 없는 것 처럼 보였다.게다가 농촌 처녀의 숫자가 현저히 줄어들어
피를 제대로 보충할 수 없었다.
이에 측근들은 천한 농촌 처녀의 피가 아니라 귀족 처녀의 피라야 더 효과가 있다고
부추겼고, Bathory는 성 내부에 전반적인 귀족적 소양을 가르치는 일종의 '귀족 여학
교'를 설립하고 한번에 스물 다섯명씩 학생을 받는다. 물론 이들도 농촌 처녀들 처럼
끔찍하게 살해당하고 피를 빨렸는데, 이때 쯤 부터 Bathory는 조심성을 잃었던 것 같
다. 시체는 들판이나 헛간, 성 바로 옆 강가, 성 근처 채소밭 등에 아무렇게나 묻었
고, 한번은 시체 네구 를 성벽 밑으로 그냥 떨어뜨려 버린 적도 있다고 한다.
마침 희생자 하나가 극적으로 탈출하여 정부 당국에 신고했기 때문에, Matya 왕은
Bathory의 사촌이며 그 지방 영주인 Gyorgy Thurzo 백작 에게 명하여 진상을 조사하
라고 명령했다.
1610년 12월 30일 성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간 조사팀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
다. 온몸에 피가 모두 빠져버린 젊은 여자 시체가 있었고, 꼬챙이에 찔린 채 아직 살
아있는 여자도 몇 명 있었으며, 지하실에 내려가보니 온갖 종류의 고문으로 만친창이
가 된 젊은 처녀들이 수두룩했다. 게다가 성 주변을 파보니 여자 시체가 50여구나 나
왔다.
재판은 1611년에 열렸지만, 정작 Bathory는 재판에 참석하지도 않았으며, 유무죄에
관해서도 일체 언급을 하지 않았다. 재판에서 집사인 Ujvary는 처녀 37명을 살해했으
며, 그중 여섯은 일자리를 찾아 성에 들어왔던 여자였다고 자백했는데, 대개는 몇주
일 심지어는 몇 달 동안이나 고문을 당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자백은 그러했지만, 실
은 총 630-660명을 죽였다고 한다. Bathory는 모든 것을 일기에 써서 기록에 남겼고,
숫자는 이를 근거로 한 것이다. Erzsi Majorova도 처녀를 공급하는 댓가로 돈을 받았
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받았다.
이 끔찍한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모두 목이 잘린 후 화형을 당했고, 수뇌급 두명은 손
가락을 잘린 후 산채로 불에 타죽었지만,정작 Bathory는 법적으로도 귀족은 처형할
수 없다는 이유로 목숨을 건졌다. 대신 Bathory는 높은 탑 꼭대기에 감금되었는데,
음식을 넣어주는 작은 구멍 이외에는 창문 하나 없는 어두운 방이었다고 한다.
감금 4년만인 1614년 8월 말, 54세의 나이로 Elizabeth Bathory는 어두운 감방에서
세상을 떠난다. 죽기전 Bathory는 재산을 자신의 아이들에게 골고루 분배해 줄것을
2명의 성직자에게 구술하기도 했다.
주민들의 반대 때문에 그녀의 시신은 그곳에 묻힐 수 없게 되었고, 그녀가 Ecsed 혈
통의 마지막인 것을 감안하여 헝가리 동북부 지역의 Ecsed에 묻혔다.
Bathory에 관한 이야기는 후대에 Sadism과 흡혈귀의 소재로 다양하게 변형되었다.
Bathory에 관한 재미있는 사실은,
첫째, Elizabeth Bathory는 엄청나게 미인이었으며, 천사처럼 선해보이는 용모였고,
특히 피부가 거의 환상에 가까울 정도로 우유빛이었다고 전한다.
둘째, Bathory는 제대로 교육을 받은 여자였을 뿐 아니라 남자를 능가할 정도로 엄청
나게 똑똑했다고 하는데, 당시의 헝가리 군주들이 거의 글을 읽지 못했던 반면, Bathory는 헝가리어, 라틴어, 로마어에도 능통했으며 지적 수준이 상당한 경지에 올라있었다고 전한다.
셋째, 그녀가 죽은 후에도 100년 이상 Bathory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금지되어있었을 만큼, 악명이 하늘을 찔렀다.
넷째, Bram Stoker의 '드라큘라'는 루마니아 군주 Vlad Dracula를 모델로 한 것이 아
니라, 실은 Elizabeth Bathory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여럿 있다.
다섯째, Elizabeth Bathory 백작 부인의 재판 기록은 아직도 헝가리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여섯째, 사건이 일어났던 지역에서는 아직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금기시 되어
있으며, 주로 슬로바키아 출신 하녀들을 죽였기 때문에 이름 대신 'The Hungarian Whore'(해석하자면 "헝가리 갈보년")라고 부른다 .

2007/01/05 13:12 2007/01/05 13:12
Posted by 승호

국가별 와인

2007/01/04 21:51
프랑스    


가. 프랑스의 와인 생산지


프랑스는 세계 최대의 와인 소비국(66.8 liter/일인, 일년: 1991년도)으로 수 백 년 동안 이어져 왔으며 지금은 최고급 와인들을 만들고자 하는 프랑스 인들의 노력으로 프랑스가 와인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 로마시대부터 계속적인 포도 생산으로 기원전 500년경 이미 남부 지중해 연안을 시작으로 프랑스 국내에 확산되었으며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중요 행사에서 사용되면서부터 더 욱 활기를 보이기 시작하여 12세기경에는 프랑스 와인이 인기 상품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양조지가 많은데 크게 서남부 지역의 보르도(Bordeaux), 중동부 지역의 부르고뉴 (Bourgogne/Burgundydkf), 동남부 지역의 론(Rhone), 중서부 지역의 르와르(Loire), 북동쪽 끝 지방의 알 자스(Alsace), 발포성 와인으로 유명한 북동부 지역의 샹파뉴(Champagne), 남부 지역의 프로방스 (Provence), 등이 있으며, 각각 특징 있는 품질의 술을 생산하고 있다.


a. 보르도 (Bordeaux) :


보르도의 적 와인은 <와인의 여왕>이라 불리며, 보르도 지방이 북극과 적도 사이 의 위도(북위 45도 부근)에 위치해 포도가 무르익는 여름에 햇빛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기후조건을 갖추고 있다. 연간 7억병 생산량 중 82&는 레드 와인, 17%는 화 이트 와인, 1%는 로제 와인이 생산된다.
대표적으로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와인, 멜로(Merlot), 매독 (Medoc)와인, 쌩때밀리옹(St-Emilion)와인, 스떼른느(Sauternes)와인, 뮈스까델 (Muscadelle),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와인, 그라브(Graves)와인 등이 있다.


b. 부르고뉴(Bourgogne/Burgundy) :


부르고뉴는 프랑스 포도 산지 중 해외 여러 나라에서 가장 큰 명성을 얻고 있으며, <와인의 왕>으로 불린다. 부르고뉴 와인은 다양한 지형 과 토질에 의해 다른 지방보다 다양한 와인이 생산되지만 반면에 와 인의 종류는 획일적이다. 거의 단일 품종의 포도로 와인을 만들며, 총 생산량은 2억 5천만 병으로, 보르도 지방의 1/3 정도 된다.
부르고뉴산 적포도주는 보르도 보다 탄닌의 양이 적어 맛이 강하고 깊지 않고 은은하며 무엇보다도 붉은 과일 향이 일찍 제 향을 충분히 드러내는 특징이 있다.
참나무통에서 숙성되기 때문에 같은 연배의 보르도에서는 느낄 수 없 는 숙성함이 있으며, 부르고뉴산 백포도주는 하나같이 입안을 감치는 상큼한맛과 감미로운 향이 특징이다.
대표적으로 샤블리(Chablis)와인, 마꽁(Macon)와인, 삐노누와(Pinot Noir)와인, 샤르도네(Chardonnay)와인, 보졸레(Beaujolais)와인 등이 있다


c. 론느(Rhone) :


론느 지방은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생산지 중의 하나이다.
와인이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00년으로 올라가며, 론느는 프랑스 최초의 포도 농원이었다고 전해져 온다.
실러 종으로 만든 코트 로티(Cote Roti)라는 와인은 <불에 구워진 언덕>이란 뜻을 가진 의미로 맛이 진하며, 비오 니에 종으로 만든 샤토 글리레(Chateau Glilai)는 프랑스 최고의 화이트 와인 중의 하나로 꼽힌다.
에르미타즈의 레드, 화이트 와인도 잘 알려져 있으며, 아비뇽(Avignon) 부근의 타 베르마을에서 <로제의 왕>이라는 로제 와인이 나온다.
<교황의 저택>이라는 마을이름이 붙여진 샤토 누프 뒤 파프 (Chateau roof du Pape) 와인의 특징은 레드, 화이트 포도를 모두 섞어 담근다는 점이며, 색과 맛이 진하고 알코올 성분이 높다.


d. 르와르 (Loire) :


르와르 강은 프랑스 중앙 산악 지대인 마시프 쎙트랄 (Massif Central) 에서 시작되 어 1,000km 을 흘러 프랑스 서부 해안 항구 도시인 낭뜨 (Nantes) 시에서 대서양으 로 합류하는 프랑스에서 가장 긴 강이다. 르와르 강 지역은 대단위 포도 재배 단지 로서 유명할 뿐 아니라 프랑스 왕실과 귀족들이 거처했던 아름다운 성들이 즐비하 며, 발레 데 로와 (Vale des Rois) - <왕들의 골짜기>란 뜻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지방 주요 와인은 화이트 와인으로 뻬이 낭떼 (Pays Nantais)지역과 뿌이 (Pouilly)와 상세르(Sancerre)의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이 생산되고 뚜렌느 (Tourained)와 앙주(Anjou)의 스위트한 와인 또한 로제 와인도 생산된다.


e. 알자스(Alsace) :


알자스 지방은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동쪽으로 라이강을 서쪽으로 보주 산맥 사이에 남북으로 길고 가늘게 늘어서 있다. 프랑스 안에서 프랑스 식으로 독일와인을 생산해 오고 있는 셈이다.
알자스 와인은 입안 가득히 짙게 깔리는 꽃 내음의 과일 향과 담백하고 깨끗한 맛으로 승부를 건다. 따라서 독일 와인은 단맛이 주류를 이루는 반면 알자스 와인은 드라이한 깊은 맛이 있다.


f. 샹파뉴 (Champagne) :


세계에서 으뜸가는 스파클링 와인으로 우아한 즐거움이 필요한 경우나 축하하는 분위기에 없어서는 안될 와인으로 손꼽히며 프랑스의 샹파뉴 지방에서 만들어지 거품이 있는 화이트 와인만을 일컫는다.
같은 거품와인이라도 스페인에서는 카바(Cava), 이탈리아에서는 스푸만테 (Spumante), 독일에서는 젝트(Sekt), 미국에서는 스파클링 와인(Sparkling Wine)이라 부른다.
와인에 녹아 있던 탄산가스는 와인을 따랐을 때에도 오랫동안 거품을 일으키며 위로 오르는데, 이 탄산가스를 만들고 병 속에 저장하는 방법은 돔 뻬리뇽(Dom Perignon)이라는 수도사에 의해 1690년경 발견되었다고 전해졌으며 그 후 30년 이 지나서야 샹파뉴 지방에서 보편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g. 프로방스 (Provence) 와인 :


프로방스 지방 포도원은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포도원으로 꼬뜨 드 프 로방스 포도주는 주로 드라이 하고 달콤한 것으로 유명하며 고품질의 적 포도주 및 드라이 백포도주도 생산하고 있다.


h. 코냑과 아르마냑(Cognac & Armagnac) :


코냑은 와인으로 만든 증류주이다. 프랑스의 코냑지방에서 와인을 증류해서 만든 술만을 코냑으로 부를 수 있으며 같은 증류주로 아르마냑 지방에서 만든 것은 아 르마냑이라 부른다. 코냑 지방 포도 생산의 95%를 차지하는 위니 블랑으로 담근 와인은 신맛을 내는 산도가 높고 포도의 예민한 향을 오래 보존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 데다가 알코 올 도수가 7~10도 수준으로 낮아 증류주를 만드는 데 안성맞춤이다 시큼한 과일 주스나 김빠진 포도 식초 맛이 나고 알코올은 아주 부드럽게 느껴진다.


나. 품질등급


프랑스 와인은 크게 AOC급 와인과 뱅 드 따블(Vin de Table) 이라는 테이블 와인 두 단계로 나뉜다.
말 그대로 AOC 와인은 원산지를 표기 할 수 있는 와인이고, 테이블 와인은 원산지 표시할 필요가 없다. 프랑스 와인의 품질 등급을 요약하면 가장 좋은 AOC, 두 번째가 VDQS, 세 번째가 뱅 드 페이, 네 번째가 뱅 드 따블이다.


a. 아뻴라시용 도리진 콘트롤레 (Appellation d’Origine Contrlee- 약자로 AOC)


원산지 명칭통제 제도 (A.O.C)는 프랑스 와인의 품질 등급을 구별하거나 포도주 생산지를 구분하는 제도이다. AOC 제도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주체는 포도 농사꾼과 양조업자, 유통 상인 등 와인에 관 련된 사업자들로, AOC 제도를 만든 원래 취지는 특정 생산지역의 토질과 기후 등 환경 조건, 고유한 생산방식을 다른 지역들과 구별하고, 이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프랑스의 AOC제도는 와인 에서 출발했지만 현재는 치즈, 올리브, 쇠고기 그리고 고추에 이르기 까지 일부 적용될 정도로 중요한 농업 제도로 확산되고 있으며, 포도 품종부터 수확량, 양조 방법, 숙성 조건 등을 모두‘이 지역의 와 인은 이래야 한다.’고 정해진 규정에 의해 만든 것을 프랑스 전체 와인의 45%를 차지하며, 이 명칭의 종류는 430여 가지이다.


b. 뱅 데리미떼 드 퀄리떼 슈페리에르 (Vins Delimites de Qualite Superieure)


‘우수 품질 한정 와인’이란 뜻으로 원산지를 표시할 수 있는 와인이며, AOC급 와인에 준하는 엄격한 규제 하에서 생산되는 와인이다. AOC급 보다 조금 품질이 낮은 와인으로 AOC급으로 올라갈 날을 기다 리고 있는 와인으로 프랑스 전체 와인 중 2% 미만을 차지하고 있다.


c. 뱅 드 페이 (Vins de Pays)


'지방와인’등급으로 뱅 드 따블 중 비교적 넓은 지역이나 지방 이름을 기재하는 와인으로 뱅 드 따블 보다 조금 더 품질이 높으며, 프랑스 와인의 11%를 차지하고 지방이름이 무려 140여 개나 있어 복잡 하다.


d. 뱅 드 따블 (Vins de Table)


특별한 규제가 없는 일반 와인으로 프랑스 와인의 25%를 차지하고, 대개 여러 산지의 포도들을 섞어서 입맛에 적절하게 만들기도 한다.


e. 뱅 드 세파주 (Vins de Cepage)


뱅 드 세파주는 뱅 드 페이 중 하나의 품종만으로 만든 와인으로 와인을 품종 별로 구별해서 시음 연 습하려는 사람에게 안성 맞춤이다.


독일


가. 와인 생산지


독일의 포도주 역사는 고대 로마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사람들이 기원전 100년경에 이 지방을 점령하여 포도재배를 시작했고 중세에 와서 수도원 등에 의해 포도 재배기술과 포도주 만드는 섬세한 기술이 발전 되었는데 이것이 독일 포도재배의 표본이 되었다. 세계 7위의 생산량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 화이트 와인이 생산량의 85%를 차지하고 있다. 독일산 와인은 알코올이 8%~9% 안팎인 와인이 대부분으로 당분이 많은 편이고, 독일산 와인은 등급이 높 을수록 스위트 와인에 속한다. 독일의 포도재배 지역은 북쪽한계에 위치해 있지만 이곳에서 제조되고 있는 백포도주는 세계에서 가장 섬 세한 맛으로 유명하다.


a. 모젤-잘-루베르 지방


미려한 과실 맛과 화려한 향기를 갖춘 깔끔한 포도주만을 생산하는 지역으로 모젤 포도주가 주 상품이 며, 모젤 포도주는 섬세한 과실품미가 가득한 것에서 흙에서 오는 냄새까지, 새큼한 맛에서 덤덤한 맛 까지 다양하고 이 다양성은 점판암질의 토양에 의해 생성된 것이다.


b. 라인 가우 지방


천혜적인 기후와 이상적인 토양에 의한 리슬링은 완벽하게 성숙되어 최고품질의 우아한 포도주를 탄생 시키고, 이렇게 탄생한 포도주의 특징은 세련된 맛, 드문 약 향초, 과실의 산미 그리고 성숙된 맛을 들 수 있다.
그 외에 슈페트불군더의 포도는 독특한 향기의 적포도주가 만들어 지고 있다.


c. 라인 팔즈 지역


강하고 세련된 리슬링 포도주가 유명한 지역이다. 또한 뮬러-투르가우, 케르나, 실바나, 마리오-무스 캇으로부터 만들어지는 부드럽고 향기 높은 맛의 포도주들도 점토와 이탄토가 혼합된 북방의 토향에서 부터 생산되고, 석회암과 점토, 황토가 섞인 남쪽의 토양으로부터는 신선하고 강렬한 포도주가 생산된 다.


d. 프란켄 지역


프란켄 포도주는 독일 포도주 중에 가장‘남성다운’ 포도주이다.
타 지역의 포도주에 비해 강하며 향기는 약하고 달지 않으며, 독특한 토양에서 오는 특이한 맛이 담긴 프란켄 포도주는 와인을 즐기는 남성분께 잘 어울린다.


나. 와인 품질등급


1971년 와인 법에 위해 제정되었으며 1982년 개정되었다


a. QmP (Qualitatswein mit Pradikat)


독일산 와인의 상급기준이며, 이 QmP 등급은 다시 6가지로 다시 세분되어 등급을 매긴다.
그 6가지는 카비넷트(Kabinett), 스펫트레제(Spatlese), 아우스레제(Auslese), 베렌아우스레제 (Beerenauslese), 트로켄베렌아우스레제( Trockenbeerenauslese), 아이스바인( Eiswein)이다.


b. QbA ( Quallitatswein bestimmter Anbaugebiete)


특정지역 (프랑스의 AC Area과 비슷)에서 생산되는 와인에 대한 중급 수준의 등급이다.


c. Landwein


프랑스의 뱅 드 페이급 와인과 같은 등급으로 Tafelwein 보다 약간 알코올 함유량이 높고 상급의 와인 이다.


d. Tafelwein


프랑스, 이태리산 와인의 최하등급인 테이블 와인 급과 동일하며 보통 알코올 함유량이 5% 내외이다.


이탈리아


가. 와인 생산지


생산량은 세계 제 2위로 연간 약 8억병을 생산하며, 이탈리아 전 지역에 걸쳐 와인이 생산되는데 모두 자 기들만의 독창적인 와인을 생산한다는 자부심 때문에 이를 전국적, 전 세계적으로 마케팅을 하지 않았다. 와인 산업에 대한 중요성을 뒤늦게 인식한 이탈리아 사람들은 1963년에 와인 생산에 관련된 법률(D.O.C 법)을 제정했고 그 후부터 와인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주요 와인 생산지로는 북서부 지방의 피에몬테 지역, 중서부 지방의 토스카나 지역이 대표적이다.


a. 피에몬테 (Piedmont)


무엇보다도 바롤로(Barolo)‘King of Wines and Wine of Kings’<와인의 왕과 왕들의 와인>, 바바레스 꼬(Barbaresco) 레드 와인이 유명하다.
바롤로 지역 와인은 산딸기, 버섯, 낙엽 등의 한데 어울려진 향기를 갖으며, 바바레스꼬 지역의 와인 은 바롤로 지역 와인보다 훨씬 부드럽고 연하며 아주 섬세하다. 숙성에 필요한 시간도 바롤로 지역의 반인 1년 정도로 훨씬 짧지만, 이 지역 최고의 와인은 아스티(Asti) 지역의 화이트 와인이다.
피에몬테의 바롤로(Barolo), 바바레스꼬(Barbaresco), 가띠나라(Gattinara), 게메(Ghemme)는 네삐올로 (Nebbiolo)가 주요 포도품종으로 모두 DOCG급이다.
바베라(Barbera)는 감미롭고, 부드러운 맛의 돌체또(Dolcetto), 다음으로 인기 있는 레드 와인용 포도 품종이다.
피에몬테 지역의 약 3백만 헥토리터의 (1헥토리터=100리터) 41%가 DOC 지역에서 생산된다.


b. 토스카나 (Toscana/ Tuscany)


토스카나는 북쪽의 프로렌스와 남쪽의 로마 사이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6개의 DOCG급 와인을 생산 하는 지역을 가지고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4개가‘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Brunello di Montalcino),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 아노 (Vino Nobile di Montepulciano), 끼안띠(Chianti), 끼안띠 클라시꼬(Chianti Classico) 이다.
끼안띠는 이탈리아 최고 와인으로 평가 되고 있으며, 끼안띠 지역에서 사용하는 병은 밑부분이 둥그렇 고 짚으로 싸여있으며(fiasco bottle), 주둥이가 아주 긴 모양으로 유명하다.
또한 토스카나 지역에 영국 미국인들이 속칭‘Super Tuscans’이라 부르는 제일 낮은 등급인 ‘Vino de Tavola’급 와인이 있다.
이태리산 와인 등급이 완전히 정착되지 않았던 기간 동안 (1960년대 이전부터 1992년 까지) DOC 범주 에 포함되지 못했던 와인들이 서서히 개선되고 그 품질이 인정받게 되어‘Vino da Tavjola’등급을 받 게 되었고 그 질과 가격은 다른‘Vino da Tavola’급 와인들과 달리 DOC급 이상 또는 최고의 DOC급과 동등하거나 더 비싼 정도가 되었다.‘Super Toscana’와인들에는 사시카야(Sassicaia), 띠나넬로 (Tignanello), 쏠라야(Solaia0, 오넬랴(Ornellaia), 라지오야(La Gioia) 등이다.
토스카나 와인 생산은 약 2.7 백만 헥토리터 ,매해 DOC 지역에서 46%가 생산되고 있다.


나. 품질 등급


이탈리아 와인 산업의 모태가 된 D.O.C 법은 이탈리아산 와인을 4가지 등급으로 구분하였다.


a. DOCG (Denominizaione di Origine Controllata e Garantita)


이태리산 와인의 초고등급이며 현재 15개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만이 이 등급을 갖고 있다.
이 등급 와인 병 목 또는 병 입구에 핑크색 종이 띠가 붙어 있는데 (화이트 와인의 경우 가끔 노란색) 정부가 와인 생산자에게 세금(주세)을 물리기 위한 강제적인 표시로 일종의 납세필증과 같은 것이다.


b. DOC (Denominizaione di Origine Controllata)


프랑스의 AOC에 해당하는 등급이며 와인 생산에 있어서 여러 가지 규정에 의하여 통제된다.


c. IGT (Indicazione Geografica Tipica)


프랑스의 뱅 드 페이에 해당하며 영어로 Country Wine 이다.


d. 비노 다 타블라 (Vino da Tavola)


프랑스의 뱅 드 따블에 해당하며 영어로 Table Wine이다.


스페인


세계 제3위의 와인 생산국이며, 그 중에서도 생산량의 약 10%를 차지하는 세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스페인의 와인 생산량은 3천만 헥토리터이며 (이탈리아의 1/3 정도) 이중 45% 정도가 수출 된다.
포도밭 면적은 가장 넓지만 날씨가 건조하고 관개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어 재배 면적당 포도 수확량은 많지 않은 편이다.


가. 와인 생산지


a. 리오하(Rioja)


피레네 산맥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스페인에서 가장 좋은 와인을 생산하는 대표적인 곳이다. 19세기 중반 유럽의 포도밭을 초토화 하였던‘포도뿌리 흑벌레(Phylloxera)’가 발생하여 프랑스의 수 많은 와인 생산자들을 당황하게 하였던 사건이 있었는데, 이 무렵 프랑스의 와인 기술자들이 이 곳으로 와서 기술과 경험을 전수받아 와인의 품격을 높이게 되었다.
이 지역은 3개의 작은 지역(Rioja Alavesa, Rioja Alta, Rioja Baja)으로 나뉜다.
Rioja Qlavesa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이 가장 향기롭고 섬세한 맛을 지니며, Rioja Alta 지역의 와 인은 약간 엷은 느낌을 갖는다. Rioja Baja 지역에서는 위 두 지역의 생산되는 와인에 묵직함을 주 기 위하여 섞을 수 있는 와인을 생산한다. 텐프라니요 종으로 만드는 리오하 적 와인은 적당한 신맛 과 단맛을 가지고 있으며, 숙성이 알맞게 된 와인이다.


b. 헤레즈(Jerez)


헤레즈의 영어식 발음은‘세리(Sherry)’로 세계에 알려진 곳이다. 세계적인 명주이며 스페인 포도 의 대명사가 되었다. 쉐리 와인은 백악질의 토양에서 재배되는 팔로미너라은 포도 품종으로 만들어 지고 주로 식전주/식욕촉진 주(aperitif)로 많이 마시며 그 강건함과 섬세한 맛이 아주 독특하다. 일반적인 와인의 생산과정과는 다르게 쉐리 와인은‘쏠레라(Solera)시스템’이라고 하는 일종의 블 랜딩 과정을 거쳐 생산된다. 이 시스템은 와인이 매해마다 항상 동일한 맛, 향기, 개성, 품질을 가 질 수 있도록 해주는 방법으로, 동일한 스타일의 쉐리 와인을 생산하기 위하여 오크통에서 오래 숙 성된 와인액과 숙성이 얼마 되지 않은 와인 액을 섞는 방법을 말한다.
쉐리 와인에는 자기들만의 특징을 나타내는 일종의 등급이 있는데 Fino, Manzanilla, Amontillado, Olorosos, Palo Cortado, Cream Sherry 등이 있으며 이중에서 Fino가 80%이상을 차지하며 Cream Sherry 는 아주 달콤한 쉐리 와인이다.
남부 대서양 해안에 1만5천 헥타르의 삼각주 지역이며 백암토 토짏로 포도주 생산에 훌륭한 여건을 가지고 있다.


c. 카탈루냐 (Cataluna)


바르셀로나 인근의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며, 북으로 피레네 산맥이 둘러싸고 있고, 동남쪽으로는 지중 해 쪽에 면한 산기슭에서 점점 높은 지역으로 올라 가면서 포도원이 있다.


d. 카스티아 (Castilla)


가장 유명한 와인은 병 입 전에 10년 이상 저장하는 아주 좋은 레드 와인인 베가 시실리아이다.


나. 와인 품질 등급


1970년 와인 등급 구분이 시작되었고 1988년에 개정되었다.


a. Denominacion de Origen Calificada (DOC)


스페인산 와인의 최고등급이며 현재‘리오하(Rioja)’지역만이 유일하게 DOC등급을 받고 있다.
사실상 프랑스의 AOC급 품질 와인이다.


b. Denominacion de Origen (DO)


프랑스산 와인등급인 AOC급과 상등하며 이 등급부터 철저한 와인 생산의 규정이 적용된다.


c. Vino de la Tierra (VdlT)


프랑스산 와인 등급인 Vins de Pays급과 비슷한 수준이며 25개의 생산지역을 가지고 있고 상위 등급으 로 올라갈 수 있는 조건의 품질을 규정한다.


d. Vino Comarcal


VdM의 상위등급


e. Vino de Mesa (VdM)


스페인산 와인의 최하위 등급으로서 와인에 대한 기준이 거의 없는 수준의 와인이다.


포르투갈


이베리아 반도 서쪽 끝에 위치한 포르투갈은 로마가 지중해를 지배할 당시 스페인을 거쳐 포르투갈의 북 동쪽 도우루(Douro)와 남부의 알랭때조(Alentejo) 지역에서 포도재배가 시작되었다.
1986년 EU에 가입 후 포도주 산업의 현대화 및 품질향상에 노력하고 있으며, 세계 6위 생산량 (1996년 기 준)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포르투갈 와인 하면 우선 마테우스 로제와 포트와인이 대표적이다.


가. 와인 생산지


a. 도우루 (Douro)


도우구 강 유역의 깊은 계곡에는 암색질의 단단한 토양으로 이루어진 구릉지대가 이어지는데 이곳 일 대에서 포트와인이 많이 생산되고 있다.


b. 미뉴 (Minho)


포르투갈에서 생산되는 포도의 1/4이 이 지역에서 생산되고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에서만 어린 와인인 비뉴 베르드를 생산하는데, 조금 덜 익은 상태에서 숙 성이 시작되어 약간의 신맛을 내기 때문에 그린와인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c. 다웅(Dao)


이 지역에서는 비뉴 마두로스를 주로 생산한다.


나. 와인 품질 등급


1756년 세계 최초로 동북부 Douro Valley 일대를 포트 생산을 위한 원산지 관리법( Dernacated Refion/ DR or Designacao de Origem/ DO) 을 제정하였고 1987년 EU가입 이후 DR을 DOC (Denominacao de Origem Controlada)로 변경등급은 4개로 구분되어 지나 크게는 2개로 분류하고 있다.


a. V.Q.P.R.D (산지 한정 고급와인)


DOC 13개 지역과 IPR 31개 지역을 두고 있다.


b. Vinho de Mesa (일반와인)


이 범주 안에 지역와인 즉 Vinho Regional의 13개 지방이 있다.


미국


미국은 연간 1천5백만 헥토리터의 와인을 생산하는 세계 와인 생산량 5위를 차지하는 와인 거대국가이다. 미국의 다양한 범위의 뛰어난 와인들이 생산되는데 특히 샤도네와 소비뇽 블랑의 화이트 와인과 까베르네 소비뇽, 멜로 그리고 진팔델의 레드와인이 유명하며 품질 좋은 스파클링 와인들도 생산된다.


가. 와인 생산지


a. 캘리포니아 ( California)


미국에서 와인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지역으로 미국 전체 생산량의 85%를 담당하고 있다.


b. 나파 벨리 (Napa Valley)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포도 재배 지역으로 샌프란시스코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나파라는 말은 인디언 말로‘많다’라는 뜻으로 이 지역이 아름답고 토질이 비옥하여 여러 산물이 생 산된 데서 나온 말로 고급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이 생산된다.


c. 소노마 (Sonoma)


나파 벨리 다음으로 유명한 와인 생산 지역으로 태평양 해안에 가깝고 기후가 온화하여 포도 재배에 적 합하다.


d. 워싱톤 ( Washington)


워싱턴 주 동쪽의 야키마 벨리에서 포도를 많이 재배하는데, 인근 콜롬비아 강에서 강물을 끌어다 관 개를 한 후 포도를 생산하고 있다.


e. 오리건 ( Oregan)


윌러메트 밸리에서 많이 재배하고 있다. 오리건 주에서는 일반 와인을 금하고 있으며 품종 와인도 그 품종이 90%이상이어야 하는 엄격한 규정 을 적용하고 있다.


f. 뉴욕 (New York)


캘리포니아 다음으로 와인을 많이 생산하고 있다.
자극적인 향이 있는 자생종인 라브루스카 종을 재배 했었는데, 프랑스 포도와의 교잡동인 하이브리드 (Hybrid)가 많이 보급되었다.


나. 와인 품질등급


미국산 와인에는 프랑스나 이태리 와인과 달리 법제화 된 와인 등급구분이 없다. 다만‘Reserve’표시 정도가 품질을 나타내는 기준이며 나머지는 모두 그 와인을 생산하는 와인 생산자의 명성에 따라 판단하여야 한다.


다. 라벨


미국 와인 라벨에는 프랑스나 이태리 것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달리 포도의 품종이 표시되어 있다.
미국산 와인에 적혀있는 포도 품종은 미국의 와인 생산지역(AVA : American Viticultural Areas) 의 기본 적 규정을 따라 그 품종을 75%이상 사용하였음을 의미한다.


호주


와인 생산량은 4백만 헥토리터 ( 세계 생산량의 2%)이고, 이중 40%를 영국에 수출한다.
호주의 국내 와인 소비량은 일인당 18리터로 이는 미국의 2배에 이르는 양이다.
호주의 포도 재배지역은 위도 30~38도 사이인 남부지역에 자리 잡고 있으며, 180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생산된 대부분의 호주 와인은 가정용이거나 영국에 수출하기 위해 만든 포트와 같은 알코올 강화 와인이 었는데, 1970대 이후 호주의 와인 산업은 기존의 틀을 탈피해 성장과 변화가 시작되었다.


가. 와인 생산지


a. 빅토리아(Victoria)


호주 남동부 멜버른 근처에 위치한 오랜 전통을 지닌 와인 지역으로 기후와 토양이 유럽과 비슷하다. 호주에서 두 번째로 많은 126개소의 양조장이 있으며 정상급의 레드, 화이트, 발포성, 포트와인을 생 산하며, 호주 전체 생산량의 약 14%정도가 생산된다.


b. 뉴 사우스 웨일즈(New South Wales)


호주 와인 생산의 두 번째 지역인 동시에 와인의 최초 생산지이다.
위도 30~35도 사이 시드니 가까운 곳에 위치하며 최상급의 샤르도네를 생산하는 마운트아담 (Moutadam), 이에 못 미치지만 상급의 샤르도네를 생산하는 카세그레인(Cassegrain), 레드와 화이트가 모두 훌륭한 레익스 폴리(Lake’s Folly) 그리고 린데만 등이 있고, 호주 전체 생산량의 27%를 차지 한다.


c. 남부 오스트레일리아(South Australia)


호주 와인의 주요 생산지로 가장 넓은 생산 지역과 생산량을 갖는다.
호주 와인의 60%가 생산되는 곳으로 고급와인을 생산하는 지역으로는 아델레이드(Adelaide)를 중심으 로 Barossa Valley, Clare Valley, Adelaide Hills가 유명하고 그 외에도 Wolf Blass, Lindemans, Seppelt 등이 있다. 저급에서 고급, 포트, 쉐리, 브랜드까지 모든 종류의 와인을 생산하며 세계 100대 와인에 끼는 Penfolds사의 그랑쥬 에르미따쥬 (Grange Hermitage)가 생산된다. .


나. 와인 품질 등급


호주의 와인에 대한 규정은 유럽의 그것과는 다르지만 미국의 시스템과는 비슷한 면이 많다.
그 규정을 보면 지역 명이 상표로 되어있는 와인은 그 지역 포도가 최소 80%이상 포함하여야 하며, 포도 품종이 되어 있는 와인은 명기된 품종이 80%이상 포함되어야 하고, 와인 수확 년도가 있는 와인은 그 해 수확 된 와인이 95%이상 포함 되어야 하며, 두 가지 이상의 품종이 섞여 있는 와인을 상표로 사용할 경우 에는 함량이 많은 순으로 표시 한다.
호주 산 와인의 특이한 점은 전통적인 혼합 방식 (보통 3가지 정도의 포도 품종을 섞는다)을 완전히 깨고 어떤 나라에서도 하지 않고 있는 새로운 호주 식 와인 혼합방식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쉬라즈에 까베르네 소비뇽을 혼합하거나 쎄미용에 샤도네이를 혼합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와인의 라벨에는 이 두 가지의 혼합된 포도품종을 함량이 많은 순서대로 명기하는 것이다.


칠레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16세기부터 양조용 포도재배를 하기 시작하였고 19세기 중반 포도나무 뿌리벌레 인 필록세라의 피해가 없었던 유일한 나라가 칠레이다.
1990년대에 이르러 유럽의 와인 명가들에 의한 투자가 이루어지고서야 종은 와인들이 생산되기 시작되었 으며, 이 무렵 칠레의 멜로 대부분이 까르미네르랑 사실이 밝혀지고 까르메네르가 칠레를 대표하는 포도 품종이 되기에 이른다.


가. 와인 생산지


a. 아타카마 (Atacama) 지방, 코퀸보 지역


북부에 위치하며 알코올 함량이 높으며 대부분 스위트한 알코올 강화 와인이다.


b. 아콘카구아 (Aconcagua) 에서 탈카 (Talca) 까지의 지방


중부에 위치하며 칠레 최고급 테이블 와인 생산지이다.


c. 마올레 (Maule) 에서 비오-비오 (Bio-Bio) 까지의 지방


남부에 위치하며 벌크 와인 생산지이다.


나. 와인의 품질 등급


프랑스의 AOC나 미국의 ava처럼 원산지 표시 와인이 있기는 하나 공식적인 등급은 아니므로 품질과는 거 리가 있고, 1998년부터 원산지, 포도품종, 수확 년도, 병 입 등을 규제하고 있다.


a. 원산지 표시 와인 (Donominacion de Origen )


원산지 표시는 그 지역의 포도 75%이상, 품종 표시는 품종 75%이상, 수확 년도 표시는 그 해 포도 75% 이상을 사용 하에 한다.


b. 원산지 없는 와인


원산지 표시만 없고 품종과 생산 년도는 원산지 표시와 동일하다.


c. 비노 드 메사 (Vino de Mesa)


양조용 포도가 아닌 식용 포도로 만드는 경우가 많고 기타 표시도 없다
2007/01/04 21:51 2007/01/04 21:51
Posted by 승호

한번의 쉼도 없이
시간은 흐른다.
모두의 희로애락을 싣고

이 길의 종착역의 有無는 이미 의미가 없다.

기차는 달리고 있기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선택의 主客은 이미 의미가 없다.

너무도 치열하기에

그대와 나의 인연은 그저 찰라의 것이나

그래도 아름답다.

그만으로 지금의 위안이니

빠르고 늦고의 시상에 연연하지 말기를.

높고 낮고의 차이에 표시하지 말기를...

때론 야생마처럼 가고,

때로는 산처럼 앉아 쉬는것...

치열함으로 점철될지라도

이 공간에 숨쉬는 것은 "나"이므로...

혼자인 것에 두려울 것도 없다.
다음 역에 가면 그대가 있을 터이니...

이 모든 생존에 추함도 끈질김도 혼돈도 함께한다.

파도의 모양으로 운명은 오고 또 오는 ....

억겁의 세월 동안 우린 그렇게 나약하고 강해왔다.

분노!

슬픔!

경악스러운 공포!

그 모두를 안고 살았던 오늘의 당신도.......

2007/01/03 01:57 2007/01/03 01:57
Posted by 승호

퓰리처상 수상작

2006/12/31 10:57
유황도

조 로젠탈 ( Joe Rosenthal ) 1945년 수상.

일본군 2만여명의 자결 옥쇄와 미군 2만 4천8백명의 사상자를 기록한 제 2차세계대전 최대의 격전지 유황도는 일본의 도쿄에서 650마일 정도 남쪽에 위, 태평양 전략상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1945년, 미국은 국가의 운명을 걸고 전쟁이 종지부를 찍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미국은 도쿄와 유황도를 동시에 급습하기 위해 유황도 탈환을 위한 전면 공격을 개시했다. 72일 동안 계속된 공격으로 섬은 초토화되었으나 동굴 요새에 숨은 2만 3천명의 일본군을 찾아내는 데는 실패했다.
  2월 19일 미해병 4사단과 5사단이 유황도 일각에 상륙, 길을 뚫었고 산 전체를 포위하는 데에는 나흘이 걸렸다. 유황도는 6천8백21 구의 산산조각난 시체와 1만 9천2백17명의 부상병들로 가득했다.
  2월 23일 아침, 적탄이 날아오는 위험 속에서 28연대 제2보병대대 E중대는 성조기를 내걸기 위해 거칠고 험준한 산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통신사의 사진기자 조 로젠탈은 갑판장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상륙부대를 따라 섬에 올랐다. 그는 다른 사진기자들과 함께 지뢰밭을 뚫고 전진, 여섯명의 해병들이 격전의 종식을 상징하는 성조기를 유황도 스리바치산 산정에 꽂는 장면을 촬영했다. 이 여섯 명 중 두명은 그 직후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이 한 장의 사진은 미국의 모든 것. 즉 미국민의 자부심과 용기와 희생을 말해 준다. 사실상 이 깃발은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승리를 알리는 동시에 전쟁이 끝났음을 말해 주는 신호였다.



베이브루스의 은퇴

나타니엘 파인, 1949년 수상

미국 프로야구 선수 생활중 통산 714개의 홈런을 친 홈런왕 베이브루스의 은퇴기념식.. 양키즈 스타디움을 떠나는 국민적 영웅 루스의 마지막 모습을 등번호 3번과 동료들 그리고 관중을 배경으로 넣어 역사적인 분위기를 살린 이 사진으로 나타니엘 파인은 1949년 퓰리처 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대동강 철교

막스 데스퍼 ( Max Desfor ) 1951 수상

우리는 민족의 비극이었던 6.25를 결코 잊을 수 없다. 여기 괴물처럼 버티고 선 철교위를 개미떼처럼 기어 올라가는 피난민의 대열이 바로그 비극을 말없이 전해주고 있다
  1950년의 극심하게 추운 겨울, 국경선인 압록강까지 전격했던 유엔군은 수십만 명의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남쪽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퇴각하던 유엔군이 평양에 도착했을 때 평양은 처참한 생지옥이었다. 수많은 평양 시민들이 공포에 쫓겨 남쪽으로의 피난길에 올랐다. 남쪽으로 가려면 반드시 강을 건너야 했는데, 그 유일한 길이 바로 폭격으로 부서진 다리뿐이었다.
  보기 흉하게 뒤틀어진 다리가 얼어붙은 강물 위에서 위험하게 흔들거렸다. 이런 다리 위를 기어가는 피난민의 모습은 마치 개미떼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개미가 아닌 인간, 가엾은 농부들이었다. 다리가 얼어붙고 손이 쩍쩍 달라붙는 추위속에서 기어가던 많은 사람들이 얼어붙은 강물 속으로 미끄러져 떨어져 버렸다.
  강위에 부교를 띄우고 강을 건너간 군인들 가운데에서 뒤를 돌아보는 한 남자가 있었다. 통신사의 사진기자 막스 데스퍼였다. 그는 폭격당해 부서진 다리의 쇳조각들 위로 기어올라가 전쟁이 몰고 온 비참한 광경을 촬영했다. 맞은 편 강변에 수천명의 피난민들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혹한 속에서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전쟁 종군 기자인 그는 그날을 이렇게 말했다.

  "내가 비록 전쟁에 강해져 있지만 이 광경은 이제껏 내가 보아 온 것 중 가장 비참한 장면이었다."




믿음과 신뢰

Wlliam c. Beall, 1958 수상

무엇인가를 구경하느라 한곳으로 시선이 몰린 군중들 틈에서 소년과 경찰이 함께 나누는 정다운 눈짓.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는 경찰관의 정중한 태도와 애정과 믿음이 듬뿍 담긴 눈으로 경찰관을 올려다보는 소년의 모습은 그때까지 <워싱턴 뉴스>지에 게재되었던 그 어떤 사진보다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고 전해진다.
  알렌 웨버라는 이 소년은 중국 상인 연합회의 가두 행렬을 보기 위해 중국인 거리인 위싱턴의 모리스 컬리네인에 서 있었다. 빨강, 노랑, 무지개 빛깔등 색색깔의 가면들과 연, 종이, 호랑이 등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했고, 불꽃놀이는 하늘 위에 가지가지 색깔의 섬광을 뿌려댔다. 이 모든 것에 매혹된 알렌은 마치 최면술에 걸린 듯 온통 정신을 빼앗겨 그쪽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전에는 이런 거리 풍경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길가에 인산인해를 이룬 구경군들 역시 가두 행진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때 한 경찰관이 작은 물체 하나가, 폭죽이 터지고 교통이 혼잡한 도로로 걸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달려간 경찰관과 소년의 눈이 마주쳤다. 모험심이 많은 어린 알렌은 길고 높은 기둥같은 경찰관의 다리 위를 올려다보고, 경찰은 허리를 굽혀 작은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이때 거리에 나왔던 사진가 William C. Beall은 그 순간을 목격하자마자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장면은 정지된 순간으로 남아 늘 우리에게 따뜻함을 전해 준다.




도쿄의 찌르기

야스시 나가오, 1961 수상

도쿄의 하비야 홀에서 다음 달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 유세가 시작되기 전 3다의 정치적 논쟁을 관람하기 위해 3천명이 모여 있었다.. <마이니찌>의 간부 사진기자인 야스시 나가오는 텔레비젼 카메라맨들과 다른 신문사 사진기자들과 취재를 하고 있었다.. 연사 대기석에서 불과 15피트 떨어진 곳에 있는 나가오는 이미 필름 한 통을 다 찍어 버린 후 였다..
사회당 당수인 이네지로 아사누마가 연단에 나와 자유민주당과 미국과 일본간의 안보 협정을 헐뜯었다. 연설 시작 몇 분 후에 한 무리의 극우파 학생들이 야유를 보냈지만, 학생들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설을 계속했다..
사진기자들은 소란의 현장으로 달려갔으나 나가오는 필름이 한 장 밖에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기다렸다. 이때 유세장 반대쪽에서 갈색 막대기를 든 그림자가 연단으로 달려들었다. 아사누마가 달려드는 대학생에게로 돌아서자 그 학생은 긴 칼로 그의 복부를 깊이 찔렀다. 아사누마가 비틀거리며 연단에서 몇 걸음 물러서자 칼이 다시 그의 가슴을 찔렀다. 연단 바로 옆에 서있던 나가오 기자는 마지막 남은 한 장의 필름으로 두 번째 습격의 칼날을 빼는 순간 셔터를 눌렀다.
바닥에 넘어진 아사누마는 곧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숨을 거뒀다. 1960년 10월 12일, 칼로 저지른 암살은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별로 오래되지 않은 과거 일본 봉건제도의 기념물이었던 것이다.




베트남의 도강

사와다 교이찌, 1966 수상

1960년대 중반, 베트남 전쟁이 한창 치열할 때 UPI통신사의 사진기자로 종군한 사와다 교이찌는 전쟁의 와중에서 신음하는 베트남 국민들의 처참한 실상을 촬영했다. 이 사진은 그 중의 하나로 퀴논 부근에서 월남인 어머니와 어린이들이 미군기의 폭격을 받고 있는 마을에서 탈출, 필사적으로 강을 건너는 긴박한 상황을 포착한 것이다.
죽음의 공포 분위기가 감도는 전장속에서 안전한 곳으로 도피하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몸부림과, 강인한 모성애가 휴머니스틱하게 표현된 이 사진은 사와다에게 1966년도 퓰리처상을 안겨 주었다.
사와다는 그후 사진의 주인공인 모자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몹시 궁금해 했다. 전선을 찾아 1년을 해메던 끝에 그는 그 주인공들과 극적인 상봉을 했다. 비교적 평화롭게 살고 있는 이들에게 그는 퓰리처상의 상금을 몽땅 털어 약 1년분의 생활비를 쥐어 주고 행운을 빌어 주었다.
사와다는 그후 미군을 따라 종군하다가 1970년 캄보디아 전선에서 전사했다. 피묻은 그의 종군기자증이 그의 시체 옆에서 발견되었다. 한 장의 역사적인 사진을 남기기 위해서 전쟁터에서 활약하다가 죽은 사진기자는 많이 있었다. 그러나 사와다처럼 따뜻한 인간애를 지닌 멋진 사진기자는 없었을 것이다.
1942년 퓰리처 사진 부문상이 제정된 이래 세 명의 일본인 사진기자가 수상을 했다. 그 중 한 사람인 사와다는 그의 사진과 함께 생생한 역사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킹목사의 장례

Moneta Sleet Jr, 1969년 수상

마틴루터킹목사는(1929-1968) 보통사람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인생을 살았다. 인권운동가로서 온몸을 던저 활동한 시기도 14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 짧은 일생을 통해 미국의 흑백차별관행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거대한 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그가 소리높여 외친 정의와 평등의 요구는 사후 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각종 차별을 반대하는 세계의 양심에 커다란 공명으로 남아있다.




사이공식 처형

1969년 수상작 에드워드 T. 아담스

1968년 2월 1일, 사이공 서부의 초론 지역에서 취재하고있던 AP통신사의 아담스는 손을 뒤로 묶인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간부가 사이공 정부군 해병대와 경찰에 체포되어 연행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뒤쫓아가자 지프가 멈춰서 있고 그곳에는 남베트남 국가경찰장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관은 연행되어온 남자가 바로 앞에 서자마자 허리에 찬 권총을 뽑아 남자의 우측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이 충격적인 길 위에서의 처형장면을 담은 한 장의 사진은,  그때까지 베트남 전쟁을 정의의 싸움이라고 간주하고있던  미국의 여론을 반전으로 돌아서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베트남 전

Dave Kennerly, 1972년 수상

전쟁이 남기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황폐해진 대지이다. 이는 전쟁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소이탄과 맹폭격으로 베트남의 풍경은 황폐해져 버렸다. 산마다 풍부하고 우람하던 나무들이 화학 반응으로 인해 완전히 헐벗어 그 낙엽만이 수북하게 쌓였다. 추수를 앞둔 농작물도 마찬가지로 파괴되었다.
  1970년 대 초에 들어서면서 닉슨 대통령의 베트남화 정책의 결과로 미육군은 서서히 본국으로 귀국하고 있는 중이었다. 즉, 국토 방어에 대한 책임을 남부 베트남인들에게 넘겨 주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오히려 더욱 격렬해지면서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확산되고 있었다. 그 까닭은 북베트남에 격렬한 폭격을 퍼부음으로써 협상을 강요, 정전이 되길 기대했던 것 때문이었다. 미국은 이 전쟁을 어떤 형태로든 빨리 마무리짓고 싶은 속셈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당장 끝나버릴 것 같지 않았다.
  통신 기자로 전생을 취재 중이던 Dave Kennerly는, 산산히 부서진 숲 한가운데를 걷던 도중 베트공의 진지에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는 이 미군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노을과도 같은 연기가 하늘 가득히 퍼져 멀리 떨어진 언덕을 뒤덮고 있는데, 황폐해진 숲을 걷고 있는 병사의 모습은 묘한 감동을 준다.




소녀의 절규

현 콩 닉 웃 ( Hyun Cong Nich Ut ), 1973 수상

전쟁의 아픔, 전쟁의 고통, 전쟁의 비극을 이 한 장의 사진만큼 실감나게 말해 줄 수 있을까? 베트남 공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거리로 밀려나온 민간인들, 그 중의 한 소녀가 불타는 옷을 찢어 던지고 벌거벗은 몸으로 공포에 떨며 울부짖으며 내달리고 있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1972년 6월 8일의 일이다. 베트남 육군은 트랭 방에서 수도로 이어지는 1번 국도를 탈환하기 위해 사흘 동안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나 베트공의 저항이 완강하자 남부 베트남 공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공군의 전폭기들은 트랭 방으로 이어지는 1번 국도 위를 저공 비행하며 빗자루를 쓸듯이 공격해 왔다.
  세상을 온통 녹일듯이 불비가 쏟아져 내렸다. 판 틴 킴 퍽이라는 사진 속의 소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소이탄으로 불바다가 되어 버린 마을에서 벗어나 달려나오고 있었다. 달리며 울부짖는 것만이 뼈저린 공포로 부터 탈출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이 처참한 순간을 베트남 종군 기자인 현 콩 닉 웃이 포착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장해 온 그는, 전쟁에 무감각해진 미국인들에게 깊은 감동과 충격을 준 끔찍한 순간을 기록한 것이다. 그가 찍은 이 사진은 베트남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데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벌거숭이로 울부짖던 사진 속의 소녀는 1982년, 20세의 숙녀가 되던 해에 미국 CBS 텔레비젼에 출연, 처참했던 베트남전의 역사를 증언하기도 했다. 




전쟁포로의 귀환

샐 비더 ( Sal Veder ), 1974년 수상

1973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자 윌맹군의 포로가 되었던 수많은 미국 병사들이 꿈속에서 그리던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5년 동안 포로수용소에서 온갖 수모를 다 겪으며 갇혀 있던 미공군 중령 로버트 스텀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통신사의 사진기자 샐 비더는 캘리포니아 드래피스 공군 기지에서 스텀 중령의 가족과 함께 그를 태운 수송기가 도착하기를 초초하게 기다렸다. 마침내 비행기가 도착하고 스텀 중령이 트랩을 내려서는 순간, 가족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그에게 달려갔다. 큰딸이 양팔을 크게 벌리고 아빠의 품으로 뛰어들고 그 뒤를 이어 장남, 둘째딸, 부인 그리고 둘째 아들이 뛰어들었다.
  참으로 감격적이며 극적인 순간이다. 이 사진은 더 이상의 설명이 없어도 기쁨에 넘친 감정을 충격적으로 공감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왜 인류가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눈물겹게 말해 주고 있다. 만약 스텀 중령이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면 이 기쁨의 표정은 슬픔과 절망으로 얼룩지지 않았겠는가.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감동깊게 서술해 주고 있는 사진이다.
  샐 비더는 스텀 중령이 가족과 재회하는 기쁨의 순간을 결정적인 셔텨 찬스로 포착하여 1974년도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 사진은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진실한 횐희의 표정을 담았으며, 아울러 사진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화마가 남긴 정적

제리게이(Jerry Gay), 1975년 수상

시애틀 남부의 작은 교회 주택가 2층 건물에서 새벽 3시에 화재가 발생했다.. 다행히 이 집에서 자던 일가족은 개짖는 소리에 참을 깨서 무사히 빠져 나왔으나, 연락을 받은 소방관이 달려왔을 때 집은 이미 지옥의 불구덩이었다.. 소방관들은 불을 끄려고 애썼으나 강둑 가파른 곳에 세워진 집이라서 송수관 연결이 어려웠다.. 불길은 제 세상을 만난듯 춤추고 도저히 그 집을 건져낼 수가 없었다..
<시애틀 타임즈>의 간부 사진기자인 제리 게이는 이 화재 현장을 취재하라는 명령을 받고 달려갔으나, 집은 이미 불타 넘어진 후였다.. 아직도 작업에 여념이 없는 소방관들의 헌신적인 노고에 제리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다선 시간 이상을 불과 싸운 후에도 그들은 계속 남아 잔해를 치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안전을 위해 벽을 허물었고, 연기는 크고 무거운 장막같이 모든 것을 내려 누르고 있었습니다.."
제리는 가파른 둑을 올라가서 다시 일터로 돌아가기 전에 잠시 쉬고 있는 소방관 네 명을 보았다.. 그들은 그을음이 잔뜩 묻은 채 흠뻑 젖어 있었으며, 연기로 뿌연 새벽의 여명 속에 잠겨 있었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제리는 그들을 찍어 진정한 미국 시민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 순간을 기록했다.. 이는 베트남 전쟁과 워터게이트 사건 등, 1970년 대에 발생한 불확실성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국의 가치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진술이었다.




이디오피아


스탠그로스펠드, 1985년 수상.

84년 가을 수단의 난민 수용소에서 굶주림에 지친 이디오피아인 모녀가 식량 배급을 기다리고 있다. 수십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아프리카 대륙의 기아는 이날 저녁 이 소녀의 목숨마저 앗아가 버렸다.




걸프전

데이비드 C. 턴리

걸프전에서 부상당한 웨이츠중사가 후송중인 헬리콥터 구석 바닥에 놓여진 비닐백에 들어있는 죽은병사가 자신의 동료임을 알고 비통해 하고 있는 모습이다.




세인트루이스의 화재

론 올시왱어, 1989년 수상

1988년 미국 세이트루이스의 한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소방관 한명이 2살난 아기를 구출해내 인공호흡을 하며 필사적으로 아이를 살릴려 하고 있는 사진이다.. 하지만 그러한 소방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기는 병원으로 옮긴지 6일만에 숨을 거두고 만다..




수단의 굶주린 소녀

케빈카터, 1994년 수상

아요드의 식량 센터로 가는 도중에 힘이 다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소녀. 그 뒤로 소녀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독수리. 이 사진은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한편, 사진가의 윤리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촬영하기보다는 소녀를 먼저 구했어야 했다는 비판과, 사진이 가진 사회적인 영향력에 관해서였다. 항상 강렬한 감정에 몰려 극한의 세계를 취재해 온 카터는 자신이 찍은 다양한 현실의 공포를 가슴 밑바닥에 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3살의 젊은 나이에...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국토를 가진 수단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심각하고도 장기적인 위기에 처해 있다. 민족과 종교적인 대립 때문에 벌어진 내전이 오랜 기간동안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뭄과 전염병까지 겹쳐 198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1백만 명 이상이 죽었다. 국제적이고 인도적인 차원의 원조 프로그램도 독재정권 아래에서는 거의 제 기능을 못하고, 구조식량은 기아에 허덕이는 난민에게는 좀처럼 전달되지 않았다..




구조

Annie Wells, 1997년 수상

Annie Wells는 산타로자 소방구조대원인 Don Lopez가 물밑의 나뭇가지에 다리가 걸린 15세의 Marglyn Paseka를 구하려 애쓰는 상황을 카메라에 담아 1997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Paseka와 그의 친구는 홍수의 피해를 입은 소노마카운티의 물줄기 중에 하나인 만타자스수로에서 쓰레기통 두껑에 매달려 물에 휩쓸려 가고 있었고 이 소식은 곧이어 사진기자인 Wells에게 무전으로 전달되었다.
Wells와 같이 일하는 사진편집장인 John Metzger는 "현장 보도 사진은 사진을 찍기가 어렵습니다, 왜냐면 무엇을 찍어야 하고 얼마나 오래 찍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수없기 때문입니다. 현장에 도착했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모든 상황이 끝나버린 후일수도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Metzger는 그 구조현장을 찍기위한 시간이 30초 정도 밖에 없었으며, 더욱 어려웠던것은 Wells가 가지고간 2대의 카메라에 필름을 다기 끼워넣을 여유가 없었던 것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Paseka의 친구는 다른 구조대원에 의하여 안전하게 구조되었고, Wells는 살려달라고 외치는 Paseka에게로 가기위해 물속으로 뛰어드는 Lopez를 보았다. 그녀는 Paseka의 어깨를 뒤흔드는 강물때문에 그녀를 구할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하지 못했었다..
어쨌든 그녀의 가장 큰 걱정은 충분한 필름이 없다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12장 정도를 찍었고 필름은 절반정도가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그녀가 죽을수도 살수도 있으므로 그때를 위해 필름을 남겨 두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라고 그녀는 당시를 회상했다.
"사진을 찍는 것을 멈춘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어쨌든 나는 기다렸습니다.."
"36판중에 24번째 필름에 내가 지금까지 찍어보지 못한 최고의 사진이 찍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진이 더욱 빛나는 것은 이 사진이 해피 앤딩으로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16세의 Paseka는 현재 카톨릭학교인 Ursuline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그녀 역시 사회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으며, 물놀이 안전 교육 세미나에 참가하여 당시 상황을 이야기 하기도 했다..

2006/12/31 10:57 2006/12/31 10:57
Posted by 승호

BLOG main image
by 승호

공지사항

카테고리

전체 (524)
끄적끄적 (111)
훈민정음 (43)
찰칵 (111)
여행기 (131)
맛집 (13)
감상 (13)
웃어요 (29)
이것저것 (14)
SFU (43)
WHO (16)

태그목록

글 보관함

달력

«   2024/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otal : 1435772
Today : 539 Yesterday : 849